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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慶曆 4년(1044), 황제는 평화를 택했다. 연燃의 오랜 골칫거리이던 괄녕栝寧이 제후국으로 봉해지는 대신 연에서 괄녕으로 조공을 보내는 강화가 체결되었다. 조공을 받았지 보낸 적이 없는 중원의 패자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¹대국에 걸맞지 않은 결정이라는 쪽과 국가의 일은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여야 한다는 쪽이 연일 논쟁을 이어갔다.

 조정의 소란은 강호무림까지 퍼졌다. 한 가지에 눈이 먼 자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지만 안위에 눈이 멀어 대국의 자존심을 헌 옷처럼 내버리다니, 체면을 중시하는 무림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가뜩이나 문을 우대하고 무를 천시하여 울분이 쌓인 젊은 무림인들이 아첨하는 간신배들을 내쫓고 무를 천시하는 제도를 고쳐야한다 주장했다. 무장하고 도성에 처들어갈 기세를 막아선 것은 무림의 대선배들이었다. 

 

 “본디 국가와 무림은 서로 참견하지 않는 법이라 하였다. 정 뜻대로 하겠거든 이 노부를 꺾고 가거라.”

 

 맹이 결성된지 500년, 굳건히 자리잡은 정파 무림에 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파도, 마교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무림이 반으로 나뉜 정파 사이의 분쟁은  황우皇祐 3년(1051) 상호불침의 원칙을 내세운 온건파의 승리로 끝이났다. 젊은 혈기가 언젠가 연륜을 이기겠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워 이름조차 붙지 않은 전쟁은 끝이 났지만 남은 것은 한 가족 간에 칼을 겨눈 상처 뿐이었다.

 

 연이은 전투에 몸이 지치고 서로 칼을 겨누며 마음이 지친 강호무림의 어른들이 동정호에 모여 이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의논했다. 그 결과, 젊은 혈기가 문제이니 그들을 잘 가르쳐 예방하기로 하였다. 이미 한바탕 사고를 친 이들이 슬슬 가정을 이룰 시기이기도 하니 그들의 자식 세대를 한 곳에 모아 가르치기로 하니, 이를 두고 삼사지약三徙之約이라 한다.

 삼사지약으로부터 4년이 흘러 지화至和 2년(1055), 각 문파에서 15세를 넘기지 못한 아이들을 동래도관東來道觀에 보내 배우게 하였다.


 

  • 창작 문파 소속 캐릭터는 각 문파의 기대주이거나, 가주 혹은 장문인의 혈육입니다.

  • 참여하는 문파들은 대문파가 대부분이지만 작은 규모의 문파 출신 역시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수학修學이 명분이나, 대부분의 문파에서는 타 지역에 있는 문파들과 친분을 만들고 다질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¹ 송과 서하의 강화 조약 참고.

의협불곡_마교.png
의협불곡_동래도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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